조원생활, 18일부터 30일까지 현대미술 전시회 '머금기, 터트리기, 비틀기, 흉내내기, 떨어지기' 개최
전시공간이 필요한 젊은 작가와 공실 활용을 고민하는 건물주의 협업사례


전시회가 열린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간 경기도 수원시 조원생활아파트(이하 조원생활) 2층. 천장 위로 은색 덕트와 붉은 소화배관이 당당한 모습을 하고 지나간다. 그 사이를 뻗어나가는 가는 전선들도 숨는 법이 없다. 바닥에는 금이 간 자국이 선명하고, 일부 전선이 널부러져있기도 하다. 비계(높은 곳에서 작업할 때 재료 운반 또는 위험물 낙하 방지 등을 위해서 임시로 설치하는 지지대, 일명 아시바)는2층 공간 군데 군데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잘못 온 건 아닌가 싶어 발길을 돌리려는 찰나. 안경을 낀 한 남자가 기자 앞에 선다. 이번 전시를 기획한 서울대학교 서양화과 김정한 교수다. 그렇게 전시회 취재가 시작됐다.

전시기획자의 의도 : "날것 그대로의 사람을 드러내고 싶었다"

가장 먼저 던진 질문은 이런(?) 공간에서도 전시가 가능하냐는 것이었다.

김정한 교수는 "물론"이라며 이렇게 답했다.

"이번 전시공간은 마감을 하지 않은 '날것'의 상태지만, 저를 포함해 우리 작가들은 이 공간의 날것에서 미적 매력을 느꼈습니다."

실제로 작가들은 공간이 주는 날것의 특징을 전시에 적극 끌어들였다.

작가들은 조원생활 2층 공간의 날것 그대로의 특징을 전시에 적극 활용했다. 공사 현장의 비계(일명 아시바)를 작품을 거는 구조물로 활용하고 천장 위를 지나다니는 은색 덕트와 빨간 소화 배관을 그대로 노출시켰다.
ⓒ 정재훈

공사 현장의 비계(일명 아시바)를 작품을 거는 구조물로 활용했다. 흔한 레일 조명 대신 '공사장에서 쓰는 임시 조명'을 가져와 작품을 비췄고, 벽에서 튀어나온 파이프 위에는 작가의 캔버스(작품)가 걸려있었다.

미적 매력을 느끼기에는 다소 거친(?) 공간이 아니냐고 되묻자, 그는 웃으며 이렇게 답했다.

"사람과 삶의 본질을 그대로 드러내고자 한 저와 작가들에게는 이 날것의 공간이 오히려 더 잘 어울립니다."

조금 더 쉽게 설명해 달라는 요청에 김 교수는 유장우 작가의 '불만 연구' 앞에 섰다.

유장우 작가의 불만연구.
ⓒ 정재훈

불만 연구는 장노출 사진 기법(카메라 셔터를 오래 열어 빛의 움직임이나 시간의 흐름을 한 장의 사진에 담는 촬영 방식)을 활용해 인간의 손동작을 빛의 궤적으로 표현한 작품이다.

작가는 다양한 직종의 노동자들에게 손목에 형광 띠를 착용하게 한 뒤, 자신의 불만을 이야기하도록 했다.

오랜 시간 촬영한 노동자의 손동작(몸짓)은 형광 띠가 남긴 빛의 궤적으로 기록돼 작품이 됐다.

김정한 교수는 "문화권마다 빛의 궤적이 다르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빛의 궤적이 다르다는 건 문화권마다 손짓(소통)이 다르다는 겁니다. 이건 우리가 속한 환경이 무의식적으로 몸짓에 영향을 준다는 방증이죠. 그럼에도 우리는 종종 스스로 독립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한다고 착각하죠. 사실은 몸의 상태나 문화처럼 보이지 않는 것들에 크게 영향을 받으며 살아가고 있는데도요.

이번 전시는 바로 그 '잊고 있던 우리 모습 그대로(날것)'를 보여주려는 시도입니다. 그런 점에서 다듬어지지 않은 이 거친 공간이 우리의 기획 의도와 잘 맞았어요. 모든 것이 드러난 이 '날것'의 공간이, 삶의 숨겨진 모습을 드러내려는 작품들과 더 잘 어우러졌죠."


[별첨1]전시회 '머금기, 터트리기, 비틀기, 흉내내기, 떨어지기' 소개

7월 18일부터 7월 30일까지 진행되는 이번 전시회의 제목은 '머금기, 터트리기, 비틀기, 흉내내기, 떨어지기'다.

김수헌 작가는 바둑을 매개로 한 목판화 연작 '글로서리'와 설치 작품 '세 번의 변명', '이상한 면'을 전시했다. 특히 '세 번의 변명'을 통해 진심과 표현의 어긋남을 이야기했다.

김신형 작가의 시선은 물질로서의 몸으로 향한다. '육체는 으스러뜨리고 사랑하라', '고목과 나'를 전시했다. 특히 '육체는 으스러뜨리고 사랑하라'는 표현주의적인 붓질로 보이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기계적이고 의식적인 붓질이 드러난다는 점이 흥미롭다.

이영채 작가는 뼈를 그린 'Femur'를 전시했다. 작품 속뼈는 특별한 상징이나 이야기를 담기보다는, 마치 '발라낸 단면'처럼 익숙한 감상을 일부러 방해하고 낯설게 만드는 데 목적이 있다.

임다은 작가는 '장치 테스트'와 '소품조각 시리즈' 작품 다수를 전시했다. 임 작가는 언어로 정리되지 않은 서사 이미지를 해체하고 재조합하는 실험을 이어간다. '장치 테스트'와 '소품조각 시리즈'는 연극 무대를 연상시키는 위태로운 구조 위에 이미지의 파편들을 배치하며 반복적인 서사의 미끄러짐과 실패를 시각화한다.

유장우 작가는 미디어를 통해 소통의 이면을 파고든다. '선회의 방법론'은 혀로 지구본을 돌리려는 행위를 통해 소통의 실패를 은유한 영상 작품이다. '불만 연구'는 다양한 문화권의 손짓을 장노출 기법으로 기록하고 시각화했다.


공실을 활용하려는 건물주와 전시 기회를 찾는 예술가

전시가 열린 조원생활 2층은 오랜기간 공실이었다. 규모가 크고 임대료가 높다 보니, 오랫동안 임차인을 찾지 못했다.

공실 활용방안을 고민하던 조원생활 운영사인 아이부키와 이광서 아이부키 대표. 이광서 대표는 김정한 교수와 작가들에게 '스윙 스페이스' 프로젝트를 제안했다.

'스윙 스페이스(Swing Space)'는 예술가들이 공간(스페이스)이 생길 때마다 옮겨(스윙) 다니며 작업한다는 것을 뜻하는 말로, 기업이나 기관이 유휴 공간을 예술가에게 단기 제공하는 것을 말한다. 뉴욕의 로어 맨해튼 컬처럴 카운슬(LMCC)이 대표적인 곳이다.

'스윙 스페이스'는 이광서 대표가 오랫동안 이어온 공간 실험의 연장선상에 있다. 서울대 서양화과를 졸업하고 10년 넘게 미술학원과 출판사, 연구소를 운영하며 미술계에 몸담아온 이광서 대표. 현장에서 쌓은 경험과 예술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그는 공간을 바라보는 새로운 방식을 꾸준히 실험해왔다.

서울 부암동 '시소' 건물에서 공실 기간을 활용해, 뮤직비디오 촬영이나 개인전을 유치하는가 하면, '장안생활'에서 아마추어 사진 동호회의 출사 프로젝트를 지원하는 등 소규모 실험을 꾸준히 이어왔다. 그리고 이번엔 조원생활에서 '아이부키 스윙 스페이스-조원생활'을 진행했다.

이번 전시의 기획자인 김정한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교수.
ⓒ 정재훈

실험적인 전시 기회를 원했던 김정한 교수에게는 반갑고 고마운 제안이었다.

김정한 교수는 "젊은 작가들에게 주어지는 전시 기회가 생각보다 적다"며 안타까워 했다. 갤러리 대관료는 비싸고, 공공의 지원 기금은 그 경쟁이 매우 치열해 잠재력 있는 젊은 작가들이 초기 기회를 얻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 탓이다.

김 교수는 유휴 공간의 문화적 가치를 탐색해온 이 대표의 노력에 고마움을 전했다. 김 교수는 "청년 주택을 짓는 아이부키가 청년 작가들을 위해 공간을 내어준 것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이어 "청년 작가들에게 조금만 기회를 주면, 예술가들이 유휴 공간에 들어가서 예술 활동을 했을 때 그 지역의 분위기가 굉장히 좋은 방향으로 개선되는 경우들이 전 세계적으로 많다"며 "뜻 있는 분들이 임대가 되기 전의 공간을 제공해 주시면, 작가들은 그 공간을 예술적으로 재해석할 수 있다. 이는 작가에게도 도움이 되고, 그 공간과 지역 사회에 모두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며 관심과 지지를 당부했다.

건물주의 믿음 : "공간을 살리는 예술의 힘을 믿어"

정작 건물주인 이광서 대표는 김정한 교수와 작가들에게 고마움을 전했다. 그는 전시 덕분에 오랫동안 비어 있던 공간이 비로소 살아났다고 말했다. 이 대표는 "비어 있는 공간은 죽어 있는 것과 마찬가지"라며, "(전시회를 통해) 작가와 관람객이 오가고 언론의 주목을 받는 과정에서 공간이 다시 살아났다"고 설명했다.

이광서 아이부키 대표
ⓒ 이광서

이광서 대표에게 '공간이 다시 살아난다'는 것은 단순히 공실이 채워지고 임대 수익이 발생하는 것을 넘어서는 의미를 지닌다. 사회주택 사업자가 된 이유이자, 사업주택 사업자로서 끊임없이 풀어내야 하는 숙제다.

"저는 임대사업자거든요. (주택을) 지어서 팔아 수익을 내는 사람이 아니에요. 최소 20년 이상 (임대를) 책임져야 하는 사회주택의 운영자죠. 공간을 살려내야 하는 건 저한테 매우 중요한 과제입니다."

'얼마에 사서 얼마에 팔까' 대신, '이 공간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면 좋을까'라는 고민으로 사업을 시작했고, 언제나 그 고민을 안고 씨름한다. 유휴 공간을 줄이고, 그 공간을 필요한 사람에게 연결하며, 사람들이 오래 머물 수 있도록, 그 안에서 즐거움을 느끼길 바랐다. 그래야 공간이 살고, 지속될 수 있기 때문이다.

말로는 간단하지만, 사실 자세히 들여다보면 하나 같이 다 쉽지 않은 일들이다.

이광서 대표는 그 모든 과정을 조금 더 부드럽게, 사람의 감정에 닿도록 도와주는 것이 바로 예술의 역할이며 예술의 힘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사람과 사회를 연결하는 가장 세련된 소통 방식이 바로 문화와 예술"이라고 말했다.

아이부키의 첫 프로젝트였던 SH공사 임대아파트 단지의 유휴 공간을 예술가들과 함께 '와글와글 우리 동네 도서관'으로 바꿨을 때도, '독거 어르신들의 공동체' 보린주택에 시도한 여러 새로운 도전들을 풀어나갈 때도 임대주택이라는 낙인을 극복하고 입주민들에게 공간에 대한 자부심을 줄 때에도 아이부키와 그는 문화와 예술을 통해 길을 찾았다. 예술은 사람을 발견하고, 모두의 마음을 움직이며, 공간에 생기를 불어넣는 출발점이 됐다.

그에게 미술은 "똑같은 것을 그리는 기술"이 아니라, "사람을 발견하고, 그것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표현해 내는 활동"이기 때문에 가능했다. 10여 년 전 어린이 창의 미술을 시작할 때에도 그랬고, 사회주택을 운영하는 지금도 변함없이 이어져오고 있다.


[별첨2]와글와글 우리 동네 도서관과 보린주택 사업 설명

와글와글 우리 동네 도서관: 아이부키와 이광서 대표는 임대아파트 단지 내 방치되어 있던 유휴 공간 문제의 돌파구로 '문화예술'을 활용했다. 그는 이곳에 글 작가와 그림 작가 등 예술가들을 초대해, 아이들과 함께 직접 활동하고 그 결과물을 책으로 엮어내는 문화 프로젝트를 통해 공간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보린주택: 서울시 금천구에 위치한 '홀몸어르신 돌봄주택'. 단순히 건물을 짓는 것에서 나아가, "지역의 수급자 및 독거 어르신들이 함께 살며 서로 의지하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고민에서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처음 시도해 보는 도전(입주자 선정권한, 공용공간에 대한 공공의 이해부족 등) 등을 뚫고 입주자, 사업자, 지역주민, 자치단체 등의 복잡한 이해관계를 잘 풀어왔다.


성공적인 경험 바탕으로 새로운 프로젝트 계속 전개할 것

이 대표는 이번 전시의 가장 큰 성과로 '성공적인 소통 경험'을 꼽았다.

10년 이상을 미술계에 오랫동안 몸담았고, 미술에 대해 누구보다 애정도 깊은 이광서 대표. 그렇다고 미술을 활용하려는 시도가 언제나 쉬웠던 것은 아니었다.

그는 "부동산을 다루는 우리와 전혀 다른 세계에 있는 작가들은 (건물주의) 저의를 의심할 수 있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소통이 쉽지 않다"고 말하며, 접점을 찾기 어려운 두 세계가 만나 '전시'라는 구체적인 결과물을 만들어낸 것 자체가 중요한 자산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이번 전시가 "아이부키의 공간 실험이 지속 가능한 모델"로 확장되길 바라고 있다. 그가 이번 프로젝트에 '아이부키 스윙 스페이스-조원생활'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도 그런 의지가 담겼다.

올해 하반기부터 서울과 수도권 일대에서 준비 중인 신규 프로젝트들과 연계해, 추가적인 스윙 스페이스를 선보일 계획이다.

"건물을 짓고 운영하는 과정에서 유휴 공간이 생기는 건 필연적입니다. 계약부터 인허가까지는 어쩔 수 없이 비는 시간이 있거든요. 이번 전시는 유휴 기간을 전시 공간으로 활용할 수 있는 하나의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했다고 생각합니다. 청년 작가들에게는 실험의 기회를, 아이부키에게는 문화예술 네트워크와 공간의 활력을 안겨준 상생의 경험이었죠. 앞으로도 아이부키와 스윙 스페이스 프로젝트에 많은 관심과 지지를 부탁드리겠습니다."


[별첨3]취재 뒷이야기

취재가 끝난 뒤, 김정한 교수에게서 이광서 대표의 진짜 '뒷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물리학을 공부하다가 미대에 진학하고, 한때는 배를 탔으며, '우주를 느끼겠다'며 직접 만든 소금물 가득한 '무중력 장치' 관에 들어가기도 했다는 것이다. (이광서 대표는 다음 인터뷰에서 보다 자세한 이야기를 해주겠다며 약속했다.)

이처럼 현실의 경계를 넘나드는 실험을 거듭해온 이광서 대표. 거듭되는 실험 속에서 마주하게 된 답답한 현실도 적지 않았다.

그는 유장우 작가의 '선회의 방법론'을 두고, 혀로 지구본을 돌리려는 행위가 '우스꽝스럽지만 무거운 은유'를 담고 있다고 평가하며, 자신의 경험담을 풀어낸다.

그에게 이 작품은 과거 자신이 숱하게 겪었던 답답한 현실의 축소판이기도 했다.

"작품에 등장하는 혀는 흔히 '말'을 상징하잖아요. 그리고 지구본이 움직이지 않는 것은 뭔가 잘 작동하지 않는 것을 의미하고요. 실제로 사업을 하다 보면 늘 느끼는 건데, 다들 말은 정말 많아요(웃음). 심지어 다 좋은 말이죠. 하지만 정작 아무것도 제대로 돌아가지 않을 때가 많죠. 작품 속 지구본처럼"

그는 공간이 필요한 사람과 공간을 가진 사람, 그리고 그 주변의 다양한 이해관계자들 사이에서 끊임없이 어긋나는 현실을 짚었다. 그에게 이번 '아이부키 스윙 스페이스-조원생활'는, 그렇게 헛돌던 지구본이 비로소 제대로 돌아가기 시작한 순간이었다. 오랜 시간 이어온 그의 실험에 대한 하나의 작지만 의미 있는 응답일지도 모르겠다.